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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11주기..'무쇠 팔' 잊지 못하는 야구팬들 사직으로
- 2022. 9. 14.

무쇠 팔' 최동원 선수 11주기 추모행사가 14일 오후 부산사직야구장 최동원 동상 앞에서 열렸답니다.

이 행사는 '최동원 보러 오이소'라는 제목에 '눈물 나게 그리운 그의 이름 무쇠 팔 최동원 11주기'라는 부제목으로 진행됐다.


고인을 추억하는 야구팬들과 최동원 야구교실 어린이 회원, 최동원기념사업회 관계자, 롯데자이언츠 관계자, 최동원 어머니 김정자 여사, 장동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총장, 조은성 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 감독 등이 참석했습니다.

최동원 야구 교실 선수 대표와 학부모 대표가 손편지를 낭독하는 시간도 가졌다.

부대 행사로 롯데 자이언츠 첫 한국 시리즈 우승 기록과 최동원 선수 활약을 담은 '1984 최동원' 야외 상영회도 진행된답니다.

롯데자이언츠 한국 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레전드 김용철이 참석해 함께 추모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이날 프로야구 SSG와 롯데의 경기 시작 전에는 전광판에 추모 영상을 상영한 뒤 선수단과 관중이 묵념하고, 최동원 야구 교실 어린이 선수단이 애국가를 제창한답니다.

경기 시구는 최동원의 어머니인 김정자 여사가 맡는다.

롯데자이언츠 선수단도 최동원의 현역 시절 등번호이자 롯데 구단의 영구 결번인 '11번'과 최동원을 의미하는 'LEGEND'가 적힌 추모 패치를 부착하고 경기에 출전한다.

'무쇠 팔'로 당대를 풍미한 최동원은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투수로 평가받는다.

1984년 한국시리즈 일곱 경기 중 5번 등판해 4승을 거둔 건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150㎞를 넘나드는 강속구와 특유의 '폭포수 커브'로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모습은 지금도 야구팬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은퇴 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등을 지낸 최동원은 대장암으로 투병하다가 2011년 9월 1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 프로필 이력 경력

출생 나이 생일
1958년 5월 24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면 북변리
사망일
2011년 9월 14일 (향년 53세)

학력
구덕초 - 경남중 - 경남고 - 연세대학교
신체 키 몸무게
179cm, 95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가족관계
아버지 최윤식, 어머니 김정자, 동생 최수원, 부인 신현주, 아들 최기호
프로입단
1983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트 (1981)
한국전력 (1982)
롯데 자이언츠 (1983~1988)
삼성 라이온즈 (1989~1990)

지도자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01, 2005~2006)[7]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2007~2008)

병역 군대
예술체육요원
종교
개신교[

대한민국의 前 야구인. 현역 시절 선동열과 함께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한 양대산맥으로 손꼽히는 투수이자 롯데 자이언츠를 상징하는 선수로 야구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사후 롯데 자이언츠로부터 영구결번을 받았답니다

그의 투구 폼은 용틀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역동적이었으며, 자기 공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 그것은 일본의 선진 야구를 배우게 한 아버지의 덕이 컸었다. 부산에서 시청 가능하던 일본프로야구 중계방송을 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호리우치 츠네오의 투구폼을 아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아마 때부터 혹사를 달고 살았기 때문에, 프로 입단 당시부터 부상을 달고 살아서 구속이 많이 느려지고 고생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진가가 드러나 몇 년간 선발 중간 마무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나와 이닝을 소화했다. 덕분에 장명부 다음으로 많은 284.2이닝을 던졌으며, 역대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 3위 기록인 223K를 기록한다. 이 기록은 2021 시즌 두산 베어스의 아리엘 미란다가 경신할 때까지 37시즌 동안이나 깨지지 않은 기록이었다. 참고로 이 기록에 가장 근접했던 이가 1996년 221K를 기록한 주형광이었다. 류현진조차도 200K 시즌은 2번(2006년, 2012년) 있었지만 끝내 최동원의 기록을 넘지는 못했답니다

-. 플레이 스타일 살펴보기

주 구종은 최고 154km/h까지 나오는 패스트볼과 커브였는데, 특히 커브는 선동열의 슬라이더와 함께 KBO 역대 최고의 마구라고 평가받는다 최고 150km/h 초반대의 패스트볼과 빠른 커브, 그리고 완벽히 타이밍을 뺏기 위한 느리고 폭이 큰 커브 등을 무기로 타자들을 상대했다. 게다가 저런 커브볼 자체가 한국프로야구에서도 흔하질 않았기에, 어떻게 보면 최동원은 메이저리그로 따지자면, 커브볼이라는 구종을 도입한 모데카이 브라운이었답니다.

최동원의 최고구속은 신명철 기자가 최동원과 최윤식씨를(최동원의 아버지를) 직접 취재해서 확인한 바, 1981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측의 스카우터 웨인 모건이 측정한 96마일(154km), 하지만 최동원이 현역에서 은퇴한 후, 일요일 일요일밤에 출연해서 자신의 최고구속은 156km라고 말했으며 이후 또 다른 방송에 출연, 손석희와 인터뷰를 할 때는 157km였다고 밝혔답니다.

이에 대해서 1978년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방송 중계 중에 측정이 되어 신문에 난 것을 지인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1980년대 당시 기사에는 157km가 아닌 153km로 되어 있었다. 또한, 1981년 당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는 최동원의 구속을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으로 평가했었는데, 당시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패스트볼 평균구속은 140km에 미치지 못 하는 수준, 평균 138km전후였답니다.

- 선동열 vs 최동원

그 자존심 강한 선동열도 '최동원이 있었기에 그를 넘고자 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발언할 정도이니 최동원과 선동열의 승부는 그렇게 팽팽했다.

3차례의 경기 이후 최동원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오랜 기간 누적된 혹사로 인한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1989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된 후 1991년 은퇴했다. 반면, 선동열은 무려 0점대의 시즌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내다 1996년 초 일본으로 진출했고 1999년 은퇴하게 되었답니다.

이후 2001년, 올스타전 전날에 펼쳐진 KBO 출점 20주년 기념 올드올스타전에 선발로 마지막으로 맞붙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5년에는 KBO 올드올스타 VS KBA 올드스타 전에 선동열, 최동원이 투수로 출장하였는데, 아쉽게도 선동열과 최동원 둘 다 KBO 올드스타에 소속되어서 맞대결이 성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은퇴 후 지도자로서 함께 그라운드에 선 기간이 매우 짧다. 최동원은 은퇴 이후 줄곧 방송인의 삶을 살다가 2001년과 2005~2006년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2007년부터 2년간 한화 이글스에서 2군 감독을 지냈다. 선동열은 2004년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를 지낸 후 2005년부터 1군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서 경질된 뒤인 2011년 안타깝게도 최동원이 대장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선동열의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이었던 김응용 감독은, 이 둘의 승부를 떠올리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선수의 자부심이 걸린 승부였기 때문에, 투수교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아마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과 성기영 감독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 3번의 승부에서 두 선수 모두 완투를 하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선동열·최동원..40년 레전드 40인, 15명이 투수
- 2022. 9. 21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기념해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선정한 ‘레전드 40인’이 모두 공개됐다.

KBO는 지난 7월 16일 올스타전부터 지난 19일까지 10주에 걸쳐 매주 4명의 레전드를 발표했다. 선정위원회가 추천한 후보 177명 가운데 전문가 투표(80%)와 팬 투표(20%) 결과를 합산해 40명의 레전드를 가렸답니다.

1~4위 레전드는 ‘국보’ 선동열, ‘무쇠팔’ 최동원, ‘바람의 아들’ 이종범, ‘라이언 킹’ 이승엽 순이다. 선동열은 전문가 투표 156표 중에서 155표(79.49점), 팬 투표 109만2432표 중 63만1489표(11.56점)를 받아 총점 91.05로 1위에 올랐다.

선동열은 명실상부한 KBO리그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힌다. 1985년 해태(현 KIA) 타이거즈에 입단한 뒤 1995년까지 통산 367경기에서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탈삼진 1698개를 기록했다. 11시즌 중 5차례나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또 7년 연속(1985~1991) 1위에 오른 것을 포함해 모두 8차례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가져갔다. 특히 1993년 기록한 0.78은 역대 최저 기록으로 남아 있답니다.

최동원은 전문가 투표에서 유일하게 156명 전원(80.00점)에게 표를 얻었다. 팬 투표에서도 54만5431표(9.99점)를 확보해 총점 89.99로 2위에 올랐다. 최동원은 1984년 51경기에서 284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면서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 탈삼진 223개를 기록한 ‘철완’이었다. 무엇보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따내면서 롯데 자이언츠에 창단 첫 우승을 안겼다. 팀과 승리를 위해 마운드에 몸을 던진 ‘투혼’의 아이콘이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전문가 투표에서 149표(76.41점), 팬 투표에서 59만5140표(10.90점)를 얻어 총점 87.31로 3위에 이름을 올렸다. 1993년 해태에서 데뷔한 그는 공·수·주 모두 천재적인 야구 센스를 뽐내면서 단숨에 프로야구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 특히 1994년에는 타율 0.393, 196안타, 113득점, 도루 84개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남겼다. 한 시즌 도루 84개는 앞으로 누구도 깨지 못할 불멸의 기록으로 여겨진답니다.


이승엽은 총점 86.55를 받아 근소한 차이로 이종범의 뒤를 이었다. 전문가 투표에서 149명(76.41점), 팬 투표에서 55만3741명(10.14점)의 지지를 얻었다. 이승엽은 1997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데뷔한 뒤 KBO리그 홈런의 역사를 대부분 갈아치웠다. 2003년 한 시즌 최다 홈런(56개) 기록을 세웠고, 2015년 사상 최초로 통산 400홈런 이정표를 세웠다. 총 홈런 수는 464개. 8년(2004~2011년) 동안 일본에서 뛰었는데도 이승엽을 따라잡을 선수는 나오지 않았다. 국제 대회에서 보여준 ‘국가대표 4번 타자’의 존재감도 독보적이랍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유일한 200승 투수 송진우, 원조 ‘타격 기계’ 장효조, 최초로 2000안타를 기록한 양준혁, ‘대성불패’ 구대성, 역대 최고의 잠수함 투수 이강철, 연습생 신화를 쓴 홈런왕 장종훈 등이 5~10위에 올랐습니다.

40인 안에는 투수가 가장 많다. 최다 득표 1~2위인 선동열과 최동원을 포함해 총 15명이 투수다. 아울러 내야수 12명, 외야수 8명, 지명타자 3명이 뽑혔다. 프로야구 원년부터 뛴 선수 중엔 박철순·이만수·백인천·김성한·김재박이 포함됐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우승의 주역인 김시진과 한대화도 이들과 함께 초창기 KBO리그의 인기를 이끈 주역들이다.

1990년대를 주름잡은 선발 투수 정민철·정민태·조계현, 100승과 200세이브를 모두 달성한 김용수·임창용, 최강 오른손 타자 김동주·심정수·홍성흔·김태균, 최강 왼손 타자 김기태·이병규·박용택, 호타준족 이순철·박재홍, ‘역대급’ 내야수 박진만·정근우와 포수 박경완도 이름을 올렸다.

두 명 뿐인 외국인 선수는 모두 두산 출신이다. 투수 더스틴 니퍼트(두산 7년·KT 위즈 1년)가 33위, 홈런왕 출신 타이론 우즈(두산 5년)가 40위에 선정됐다

선동열 "최동원은 내가 넘고 싶던 우상"
- 2022. 7. 18

선동열(59)이 없었더라도 최동원(1958∼2011)은 야구팬이 기억하는 최동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동원이 없었다면 선동열은 지금의 선동열과 많이 달랐을지 모른다. 선동열이 프로야구 출범 40주년 기념 ‘레전드 40인’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뒤 가장 먼저 꺼낸 세 글자가 ‘최동원’인 게 우연이 아닌 이유랍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2 올스타전을 앞두고 전문가 투표 80%, 팬 투표 20%를 합산해 선정한 레전드 40인 가운데 총점 1∼4위를 먼저 공개했다. 선동열이 91.05점으로 1위에 올랐고 최동원이 89.99점으로 그다음이었다.


선동열은 이날 시상식에서 “최동원 선배는 어릴 때는 내 우상이었고 커서는 내가 넘어서고 싶은 목표였다. 또 함께 국가대표를 지낼 때는 정말 좋은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려주신 멘토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제 선동열을 상징하는 등번호는 18번이 됐지만 1985년 해태 입단 때 그가 원했던 등번호는 사실 롯데 에이스 최동원과 똑같은 11번이었다. 해태 간판 타자였던 김성한(64)이 이미 등번호 11번을 달고 있었기에 차선으로 선택한 번호가 18번이었다. 최동원이 에이스 상징인 1번 대신 11번을 선택한 건 “숫자 1은 외로워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1자 두 개가 기둥처럼 잘 버텨 달라는 뜻에서 11번을 선택했다”고 말했답니다.


역시 1자 하나는 외로웠다. 선동열은 “오늘은 정말 최 선배 생각이 많이 나는 하루다. 최 선배가 함께했다면 이 자리가 더욱 의미 있는 자리가 됐을 것”이라고 그리움을 전했다. 최동원을 대신해 시상식에 참석한 아들 최기호 씨는 “아버지를 기억해 주시고 추억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답했다.

한편 레전드 40인 투표 3위는 총점 87.31점을 받은 ‘바람의 아들’ 이종범(52), 4위는 86.55점을 기록한 ‘라이언 킹’ 이승엽(46)에게 돌아갔다. KBO는 레전드 40인 명단을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