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프란체스카 결혼식 사진' 88년 만에 최초 공개…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2022-08-22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독립운동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이 오는 9월 7일 오후 2시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답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25년간 독립운동을 한 내용과, 하야 후 5년간의 하와이 생활을 담은 이번 다큐멘터리는 1934년 미국 뉴욕에서 촬영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결혼식 사진'은 물론, 이승만이 하와이 한인들의 자립과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운영한 '숯가마터' 등 국내에서 한 번도 소개되지 않았던 미공개 자료들을 수록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랍니다.
특히 이번에 공개되는 결혼식 사진은 이승만의 '양녀' 김노디 지사(2021년 애국장)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김 지사 사후 그녀의 딸 위니프레드 리 남바 씨가 보관해오다 제작진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운동하다 일제 탄압 피해 1913년 '하와이行'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난 이승만은 12살에 사서삼경을 모두 외울 정도로 천재였으나, 부정부패한 조선의 과거에 수차례 낙방하고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답니다.
이후 국민 계몽 활동을 하다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한성감옥에 갇힌 이승만은 감옥에서 '독립정신'이란 근대정치사상서를 집필하며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게 된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8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이승만은 미국에서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과정을 5년 만에 마치고 돌아와 YMCA 청년부 간사로 활동한답니다.
그러다 '105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2년 4월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도미, 이듬해 2월 하와이에 정착했다.
'한인 자립' '독립자금' 마련 위해 '숯가마터' 운영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하와이로 피신한 이승만이 그곳에서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출판을 통해 한인들의 계몽에 앞장섰던 모습을 따라가 본다.
한인 동포들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한인공동체를 만들고, 930에이커에 달하는 힐로 지역 나무 임야를 매입해 숯가마터를 세우는 등 지금껏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승만의 행적도 그려진답니다.
건국이념보급회 김효선 사무총장은 "그동안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각종 오해와 루머가 난무했다"며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 가서도 국민의 계몽과 자립을 위해 힘썼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가 알았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말했답니다.
김 사무총장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환율이 너무 올라 매우 힘들었는데, 많은 분들이 후원해 주셔서 끝까지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며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특히 국회의원 대회의실을 대관하는 데 힘써 주신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님께도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고 덧붙였답니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오는 11월 하와이 국제영화제에 출품됐으며, 영화제 이후 미국 유일 한인 지상파 채널인 KBFD TV와 미국 전국 위성방송 채널 TAN TV에서 방영된다. 한국에서는 케이블TV 등을 통해 방영될 예정이랍니다.
프란체스카 회고록 '6·25와 이승만' 출간 - 2010. 6. 11.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사진 오른쪽)가 쓴 <6·25와 이승만>(기파랑 펴냄)이 출간됐다. 1983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것을 한국전쟁 60돌을 맞아 엮어낸 것이랍니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25일 새벽부터 1·4후퇴 이후 유엔군이 재반격을 시작한 이듬해 2월15일까지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비망록으로, 역사책에 적극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 발발 이튿날인 6월26일 새벽 이승만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전하겠다"는 부관의 대답에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한 사람씩 죽어갈 테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말했다.'라고 전했답니다.
초대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가 독립운동가 출신 이범석 장군을 못마땅해 한 탓에 그를 국방장관에 앉히는 결정에 반대했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프란체스카의 판단으로는 무초는 고집이 세고 미국의 말을 잘 안 듣는 독립운동가 출신을 싫어하고 "일제하에서 적당히 지냈던 사람들"을 가까이했다는 것입니다.
또 전쟁 당시 정부 요인들이 자식의 병역 기피를 꾀할 요량으로 미국 대사에게 유학비자를 부탁했다는 내용, 일부 정치인들이 전쟁 중에도 자신을 정부 각료로 앉혀 달라고 로비한 내용도 나온다.
그러나 한강철교가 이승만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의 결정에 따라 폭파됐다는 이야기, 피난하면서 국민에게 "나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동요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라디오 녹음 담화를 발표했다는 사실 등 이 대통령에게 불리한 사실들은 나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