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시복 1925년 교황 비오 11세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 미리내성지 축일 7월 5일
김대건은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신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성 피에르 모방 신부의 천거로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해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단 1년밖에 사목생활을 하지 못하고 붙잡혀 군난을 받고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탄생' 윤시윤 "저만의 김대건을 보여주고자 노력했어요" - 2022. 12. 8.
최근 개봉한 영화 '탄생'은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다.
특히 그의 생애 중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청년 김대건으로서 삶에 초점을 둔다. 그는 서학(西學)을 사학(邪學)으로 배척하던 때 어렵게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외국어 등 신문물을 배워 돌아왔다. 영화는 신앙을 넘어 조선의 근대를 열고자 했던 인물로 김대건 신부를 그린답니다.
'탄생'에서 주연을 맡은 윤시윤은 8일 김대건 신부를 두고 "새 시대를 열었던 개척자 같다"고 평가했다.
이날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청년 김대건이 저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저만의 김대건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종교인으로서 위대한 사람을 표현하려고 했다면 제가 연기를 했으면 안 됐습니다. 또 성인이라고 표현되는 인물을 막연하게 거룩하게만 다가갔을 때는 관객들에게 외면받는다고 생각했지요. 저 자신을 많이 감추는 대신 청년 김대건이라는 인물 많이 보여주려고 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작품에서는 윤시윤이 외국어를 배우거나 대화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가 어렵기로 소문난 '라틴어'를 구사하는 장면도 적지 않다.
"한국어와 외국어 연기 비중이 거의 반반이었던 거 같아요. 옛날 언어인데다,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촬영 전 한 달 동안 아침마다 7시에 일어나 프랑스어 2시간, 중국어 1시간 등 하루 5∼6시간 정도를 외국어 공부에 썼던 거 같습니다."
윤시윤은 외국어를 구사했던 장면이 무척 '진짜 같았다'는 평가에 "프랑스어 발음 중에는 혀를 깨물어 내는 발음이 많다"면서 "아침마다 혀를 깨물면서 연습을 하다 보니까, 어느 날 아침밥을 먹을 때 너무 아프더라. 혀가 헐어서 식사를 못 하기도 했다"며 웃었답니다.
작품 후반부 클라이맥스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이 그려진다.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들에게 둘러싸여 참수를 당하는 김대건 신부를 연기하는 과정에서 배우로서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랍니다.
윤시윤은 그 순교 장면을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긴장했어요. 엄마에게 전화해서 (촬영현장으로) 내려와달라고 했습니다. 서울에 계셨던 엄마가 충청도까지 오셨고, 30분간 가족들과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리고 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탄생'에는 국민배우 안성기가 수석 역관 역을 맡아 함께 했다. 최근 암 투병 사실이 알려지며 많은 안타까움을 줬던 안성기는 본격적인 투병에 앞서 동료 배우들과 이 작품을 촬영했다.
윤시윤은 선배 배우 안성기를 향해 "제게는 영웅 같은 분"이라고 했다.
"이번 영화에서 열심히 연기한 이유는 (안성기) 선생님이 보시겠지,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 열심히 했어요. 선생님은 제가 인생에서 배우로서 살아가는데 롤모델입니다. 선생님처럼 신뢰하는 배우, 선한 배우가 되는 게 제 꿈입니다."라고 언급했답니다.
- 윤시윤 프로필
출생 나이 1986년 9월 26일(36세
고향 출생지 전라남도 순천시
직업 배우, 방송인 활동 기간 2009년~
종교 개신교(예장합동)
소속사 모아엔터테인먼트 학력 경기대학교 연기학과
대한민국의 배우 겸 MC이다. 과거에는 윤동구였으나 개명하였다.
본명은 윤동구였으나 대학 진학 후 부모에 의해 현재 이름으로 개명했다.
2009년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으로 데뷔하였으며, 2010년 KBS2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김탁구 역을 맡아 50%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며 국민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답니다.
2014년 4월 28일 대한민국 해병대 병 1184기로 사병 입대하였고, 2016년 1월 27일에 전역하였다.
2017년에는 세가지색 판타지에서 소인성 역할로 출연하였다. 공시생의 애절한 삶을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좋은 연기력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20화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로 조수향에게 자신같은 사람들의 현실을 말하면서 화를 내는 모습에서 윤시윤의 한층 더 발전된 연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2018년, 마침내 윤시윤은 대군 - 사랑을 그리다로 연기력과 흥행을 모두 잡는다. 대군에서 은성대군 연기를 맡은 윤시윤은 연기력도 호평을 받았고 드라마 또한 TV조선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같은 해 윤시윤은 친애하는 판사님께에서 연기력에서 본인 커리어 역대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차가운 판사 형 한수호와 능글맞은 양아치 한강호는 거의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뛰어난 1인 2역 연기를 펼쳤고, 드라마 또한 상당히 흥행했다. 윤시윤은 이 드라마로 그 해 연기대상 남자 우수상의 영광을 차지한답니다.
제대 후 윤시윤은 더욱 훌륭해진 연기력과, 여전히 훈훈한 미소년 비주얼로 연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데뷔 초에는 여리거나 맑은 느낌의 소년스러운 연기를 주로 했으나 총리와 나부터 강인한 남자의 연기도 소화하더니 군 제대 후에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배우가 되었다. 최근작인 녹두꽃에서는 조선시대 말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매우 설득력 있게 연기해냈답니다.
특히나도 이 드라마에서 보여준 애절한 로맨스 연기에서는 표현력이 절정에 달한 모습이었다. 반면 차기작인 싸이코패스 다이어리에선 전작의 이지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리버리하고 순박한 캐릭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윤시윤은 현재 다양한 배역을 시도하고 있고, 다양한 배역들을 자신의 모습으로 소화중인 모습이 돋보이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 마땅한 연기자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한경일은 돌연 잠적한 이유에 대해 "3집 때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회사 사장님이 용돈을 주시더니 '일주일 정도 숨어있어라'고 하시더라"면서 "왜 그런지 얘기를 들어봤더니 조금 더 주목 받기 위해서 '소속사 하고의 트러블 때문에 잠적을 했다'고 작전을 짰다"고 털어놨답니다.
결국 소속사의 잘못된 노이즈 마케킹으로 오해가 쌓여갔다. 결국 해명의 기회없이 한 순간에 인기가 추락, 결국 방송에서 사라지게 됐다.
한경일은 "방송 관계자분들은 가수 한경일이라는 사람이 무책임하다고 낙인을 찍으셨다"면서 "방송도 못하고 방송도 잡히지 않고 외부에서 행사도 들어오지 않았다. 2004년을 마지막으로 전성기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가수가 된 한경일. '내 삶의 반'으로 전성기를 보냈지만, 나아지지 않은 형편. 한경일은 "수입이 정말 단 1원도 없었다. '집이 너무 힘들다'면서 이렇게 사정을 하는데도 소속사에서 돈 없다고 못 준다더라"며 "요즘 말로 하면 노예 계약이다"고 털어놨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유일하게 있던 반지하 집을 팔고 모든 빚을 다 갚고 길거리에 나앉은 상태로 어쩔 수 없이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큰 누나네 집으로 부모님과 제가 얹혀 살았다"고 했다.
6년 전 치매,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어머니. 한경일은 "진단을 받을 정도의 상태가 됐을 때는 심각한 상태에서 발견을 했더라"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효도도 못 시켜 드렸고, 성공한 모습도 못 보여드렸는데 저를 세상에서 제일 많이 응원해주신 엄마가 그걸 더 이상 기다려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막막하고 너무 슬펐다"고 털어놨답니다.
한경일은 결혼식 축가를 위해 이동했다. 한경일은 "한동안 방황도 많이 했다. 술에 많이 의지하고 살았던 적도 몇 년 있다. 인생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할 정도로 남 보기 부끄럽게"라면서 "좀 자포자기 하면서 살았던 시기가 있다"고 했다.
가수 활동을 멈춘 이후 축가, 보컬 레슨 등으로 생계를 유지, 수입이 없었던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노래였습니다.
한경일은 "안 가본 무대가 없다. 주변에서 돈 줄테니까 노래하라고 하면 안 가본데가 없다"면서 "정말 가리지 않고 노래를 했고 돈이 적어도 노래를 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술이자 유일한 무기인 노래를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가야했다"고 했다.
8년 동안 매달 한곡씩 꾸준히 발표해온 한경일. 그는 "음원을 디지털 싱글로 내는 일을 안 하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그러면 발표하는 곡도 없고 옛날에 활동 좀 했었던 가수로만 남는다"면서 "그럼 저는 사라지는거다. 존재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했다.
한경일은 "굉장히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다. 다만, 제가 계속 노래를 할 수 있도록 명분이 계속 생겼으면 좋겠다"면서 "그리고 저도 용기를 내서 좀 과감하게 많은 변신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그리고 더 기쁘게 활동할 수 있을 거 같다"고 밝혔답니다.
- 프로필 이력 경력은?
본명 이름은? 박재한 (Park Jae-han) 출생 나이 1980년 3월 19일 (42세)
"괘씸한 사람으로 방송가에 찍혀"..'내 삶의 반' 한경일이 사라진 이유 - 2022. 6. 8
노래 '내 삶의 반'으로 유명한 가수 한경일(42)이 근황을 공개했다.
지난 7일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에 공개된 영상에서는 2002년 데뷔해 히트곡 '내 삶의 반'을 남기고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인기를 끌었던 한경일이 출연했답니다.
그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더라. 제가 2년 반 정도 고정 출연을 했다"며 "그때 얼굴을 많이 알렸다. '한밤의 TV연예'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리포터를 맡았다"고 회상했습니다.
한경일은 어느샌가 방송가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는 "왕성하게 활동하다 인사도 없이 갑자기 떠난 것처럼 됐다"며 "소속사가 노이즈 마케팅을 하려고 했다. '소속사가 건강이 안 좋은 한경일에게 스케줄 강행군을 시켜서 불화가 생겼다. 결국 한경일이 잠적했다'는 스토리였다"고 설명했답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한경일은 "제가 소속사 은혜도 모르고 이름 좀 알렸다고 방송을 펑크 낸 괘씸한 사람으로 방송가에서 찍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방송가에 오가는 이야기였다"며 "매니저가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저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방송에 출연할 수가 없었다"고 자취를 감췄던 이유를 밝혔답니다.
일자리를 잃은 한경일은 활동 당시에도 수익 정산을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데뷔했을 때부터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며 "'내 삶의 반'이 얼마나 돈으로 환산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몇 년간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는 데도 그랬다"고 털어놨답니다.
한경일은 방송 제의가 들어와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창피해서 모두 거절할 만큼 어렵게 지냈다고 했다. 그는 "(방송에서) 집에 찾아오겠다더라. 작은 집에 월세로 부모님까지 셋이 살고 있었다. 바퀴벌레도 나왔다. 이 꼴을 보여줘서 득 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찌질하고 처참하게 살고 있었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안겼다.
이어 "어머니까지 파킨슨 병, 알츠하이머에 걸리셨다. 좁은 집에서 활동을 못 해서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며 "처음으로 큰 빚을 내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근황을 전했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는 그는 "돈 벌 수 있겠다 싶어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라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생각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잘 나갈 때 돈 많이 벌어놓고 흥청망청 쓰다가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더라"고 자신을 둘러싼 오해를 해명했다.
현재까지 축가를 부르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는 한경일은 "수입이 없다 보니까 스케줄이 맞으면 축가를 부르러 간다. 개인 레슨하는 보컬 학원은 유지만 하는 수준"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한 달에 한 번씩 음원을 발표하지만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그것마저 안 하면 저는 아무도 모르게 묻혀 사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내 삶의 반'을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가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서 기쁘다. 노래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마음에 드는 노래를 제가 부른다면 많이 사랑해달라"고 인사를 전했답니다.
12일 방송된 TV CHOSUN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맛'에서 양미라 정신욱 부부는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양미라는 정신욱에게 자신이 끓여준 커피가 맛있냐며 대답을 유도했다. 정신욱은 머리를 감지 않고 드라이 샴푸만 쓴 양미라를 타박하며 티격태격했다. 그러면서도 스타일리시한 패션을 자랑하며 다정하게 가로수길 데이트를 나섰다. MC들은 "JK 김동욱, 이동건 닮았다"며 정신욱의 외모를 칭찬했다.
정신욱은 꽃을 들고 음소거 미소를 짓는 양미라를 위해 인증샷을 찍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포토그래퍼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어 김치볶음밥, 비빔면을 먹으며 또 한 번 대식가의 면모를 자랑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양미라는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하지만 노래 실력은 기대 이하여서 주위를 웃겼다. 가리비, 랍스터를 먹던 중 결혼 후 처음으로 양미라가 남편에게 진심을 물으며 ‘속마음 토크’가 이어졌다. 양미라는 정신욱에게 "결혼하니까 어때?"라고 물었다. 정신욱은 "결혼하니까 좋다. 밥도 같이 먹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는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언제가 제일 예뻐?"라는 물음에는 "먹을 때와 잘 때"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양미라는 "다 입 다물 때다"라며 서운해했다. 정신욱은 "먹으면서도 떠들잖아"라며 팩트 폭행을 날렸답니다.
두 사람은 열애 4년 반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 정신욱은 "난 결혼을 1년 만에 결심했다. 그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없다. 그냥 이 아이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다 그렇다. 예뻐서 착해서 잘해서가 아니라 얘와 결혼을 해야 행복하겠구나 생각한 거다. 이유가 어딨냐. 좋은 게 좋은 건데"라며 진심을 꺼냈다. 양미라는 무뚝뚝했던 남편의 마음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 양미라 프로필 이력 경력
출생 나이 1982년 7월 10일 (40세) 고향 출생지 서울특별시
신체 키 몸무게 174.5cm, 56kg, O형 학력 숭덕여자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 / 학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 / 석사)
가족관계 부모님, 여동생 양은지, 제부 이호, 조카 이지율, 이지아, 이지음 배우자 정신욱(1980년생, 2018년 10월 17일 결혼 ~ 현재) 장남 정서호(2020년 6월 4일생) 장녀 정혜아(2022년 7월 1일생)
양은지는 2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몇달간 달려오던 그 시간도 이제 잠시 멈춤 모드"라며 장문의 글을 게재했답니다.
그는 "처음에 '제가 해보겠습니다' 하며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하게 되었던 나. 미드필더 남편을 둬서 남편의 경기날엔 눈이 남편만 향하던 나는. 사실 골키퍼는 어떻게 하는지 잘 몰랐고… 몰랐기에 덤벼들었는지도 모른다.. 용기가 어디서 샘솟아 났던것일까?ㅋㅋ 지금 생각해보니 모르니까 덤볐나보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우여곡절끝에 아 골키퍼는 이렇게 하는거구나 하며 혼자 터득하고, 알아갈 즈음.. 시즌이 끝났다. 너무 아쉽고 아쉬워 어제는 잠이 오질 않았고, 다시봐도 내 자신을 자책만 하게 되었던게 사실.. 팀원들에게도 너무 미안하고 ~ㅠㅠ"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답니다.
또한 그는 "예능인줄 알았는데 다큐였던 골때녀 ! 응원만 해오던 사람이 직접 축구공을 발로 차고, 손으로 잡고. 내가 초록색 잔디위에 유니폼을 입고 서있다니 ~ 다시 생각해도 너무 값진 경험이고, 웃기기도 하고, 더 잘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또 이를 악 물어보기도하고 ㅋㅋ 정말 육아만 하던 감정들과는 너무 다르게 내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러 감정들…. 참 신기하다"며 소감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동안 준우승까지 올라올수 있도록 필드에서 힘들게 뛰어준 국대패밀리의 언니, 동생들 !! 그리고 늘 언제나 이름 불러주며 경기장 안에서 코칭해주신 김병지 감독님!! 안보이는 곳에서 더위와 싸우며 녹화진행하시고, 한컷한컷 전 출연자들 섬세 하게 담아주신 모든 골때녀 스탭 여러분!! 감사하고 , 즐거웠습니다 !!!"라고 덧붙이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한편 지난 2009년 축구 선수 이호와 결혼한 양미라 동생 양은지는 SBS 예능프로그램 '골(Goal) 때리는 그녀들'에 출연해 ‘FC 국대 패밀리’ 골키퍼로 활약했다.
양은지, "이호와 결혼 7년, 함께 산건 1년밖에.." - 2015. 12. 16
가수 양은지가 현대 모터스 소속 이호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고백했답니다.
양은지는 15일 tvN '택시'에 언니 양미라와 함께 출연했다. 이날 양은지는 축구선수 이호와 결혼생활에 대해 "3년간 연애하고 결혼해 현재 결혼 7년차를 맞았다"며 "만난 기간을 모두 더하면 10년이지만 제대로 같이 산 기간만 따지면 1년 정도인 것 같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오만석은 "이호가 해외에서 많이 활동해 떨어져 있던 시간도 많았냐"고 물었고, 양은지는 "맞다. 그냥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고 답했다.
양은지는 과거 걸그룹 '베이비복스 리브'(Baby Vox Re.V)에서 활동했다. 이호와 2009년 결혼해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있답니다.
이호는 2003년 울산 현대 축구단에서 데뷔한 후 △러시아 제니트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랍에미리트 알 아인 FC △일본 오미야 아르디자 등 해외 리그에서 주로 활약했다. 또 2006년 제18회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현재는 전북 현대 모터스에 속해있다.
양은지·이호, 12일 결혼 - 2009. 12. 13
그룹 베이비복스리브 출신의 양은지(25)와 성남 일화의 이호(25)가 웨딩마치를 울렸다.두 사람은 지난 12일 오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양은지·이호 커플은 지난 2006년 한 모임에서 만나 3년간 사랑을 키워왔답니다.
식전 기자회견에서 양은지는 "첫번째 프러포즈는 (이호가) 촛불로 장식을 했는데 초 때문에 카펫이 타들어가서 나중에 가격을 다 물어줬다"고 웃었다.
이어 "두번째는 집 앞에서 꽃다발 내밀고 반지를 다시 껴주며 '나랑 결혼해줄래'라고 말해서 '당연하지'라고 답했다"고 프러포즈 에피소드를 전했습니다.
연기자 양미라의 친동생인 양은지는 일본에서 먼저 데뷔한 뒤 국내로 돌아와 걸그룹 지니스 및 베이비복스 리브 멤버로 활동했다. 현재는 베이비복스 리브를 탈퇴하고 연예 활동을 중단했다.
이호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지난 2006 독일월드컵에서 활약했고, 현재는 성남 일화 소속이랍니다.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임기는? 1953년 1월 20일~1961년 1월 20일 부통령 리처드 닉슨
나이 출생일 1890년 10월 14일
고향 출생지 미국 텍사스주 데니슨 사망일 1969년 3월 28일(78세)
정당 공화당 배우자(부인 아내 와이프) 매미 다우드 아이젠하워
종교 장로교 별명 아이크 (Ike)
미국의 34대 대통령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연합군 사령관으로 횃불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였다.
군인 장교였어도 아이젠하워는 또한 평화에 전념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직위를 차지에 대비하여 아이젠하워는 1953년 한국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북한과 남한을 휴전 협정으로 가져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2개 기간 동안 아이젠하워는 공산주의 소련과 세계 대결에서 미국의 전통적 원자 무기에서 증가를 감시하였다. 냉전의 절정에서 아이젠하워는 공산주의가 북베트남을 차지하였어도 베트남에서 군사 개입 거부에 소련의 확장을 거부하는 데 추구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인종적 편견을 위하여 약간의 관용을 가졌고, 미국의 무력의 인종 차별 대우 폐지를 완료하는 명령을 내렸다. 1954년 미국 대법원은 미국 남부에서 학교들을 인종적으로 분리한 법률들을 위반하였고, 1957년 법원 판결을 지키는 데 아칸소주 리틀록으로 연방군을 명령하였다. 그의 별칭은 "아이크" (Ike)였답니다.
- 초기 생애
텍사스주 데니슨에서 데이비드 제이컵 아이젠하워와 아이다 엘리자베스 스토버에게 7명의 아들 중 3번째로 태어났으며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그들의 단 하나의 자식이다. 그는 "데이비드 드와이트"로 이름이 지어졌고 "드와이트"로 불렸다. 후에 그의 주어진 이름들의 차례가 바뀌었는데 아이젠하워 도서관 · 박물관에 의하면 웨스트포인트에서 아이젠하워의 입학 허가에 이름 전환이 일어났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가족은 독일 계통이며 자를란트주 지방에서 왔으나 18세기 이래 미국에서 살았다고 한다. 가족은 1892년 캔자스주 애빌린으로 이주하였고, 1909년 아이젠하워는 애빌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답니다.
아이젠하워가 5세 때 그의 부모는 후에 여호와의 증인 이름을 택한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의 신봉자가 되었다. 아이젠하워 집은 1896년부터 1915년까지 지역 회의장으로 지내왔으나, 그와 그의 형제들도 또한 1915년 이후에 정규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멈추었다. 시간이 지나 아이젠하워는 장로교 신자가 되었고, 퇴직할 때에 게티스버그 장로교회의 교인이었다.
1916년 7월 1일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매미 제네바 다우드 (1896 ~ 1979)에게 결혼하였다. 그들은 2명의 자식들 - 어린 나이에 성홍열로 사망한 다우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917 ~ 21)와 성인기를 생존한 존 셸던 데이비드 다우드 아이젠하워 (1922 ~ 2013)를 두었다. 존 아이젠하워는 미국 육군에 복무하고, 그러고나서 저자가 되었으며 벨기에 주재 미국 대사를 지냈다. 메릴랜드주에 위치한 대통령 별장 캠프데이비드의 이름이 지어진 존의 아들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는 1968년 리처드 닉슨의 둘째 딸 줄리에게 결혼하였답니다.
- 2차대전과 군생활
아이젠하워는 1911년 6월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부모가 평화 주의자들이었어도, 교육열이 있는 분들이어서 그의 사관학교 입학을 반대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강한 선수였으며 미식축구 팀에 있었다. 그는 칼리슬 인디언스를 상대로 전설적 짐 소프를 상대로 미식축구를 하였으며 그를 태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러고나서 소프가 아이젠하워와 그의 파트너에 의한 태클을 피할 때 부상을 당하였다. 터프츠 대학교를 상대로 경기가 열리는 동안 아이젠하워가 자신의 무릎을 비틀며 1주 후, 승마 훈련을 받은 동안 더욱 나가서의 약해진 무릎 부상이 그의 미식축구 경력을 끝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사관학교를 1915년 낮은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텍사스주와 조지아주에 있는 다양한 주둔지에서 1918년까지 보병과 복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아이젠하워는 새로운 탱크 군단의 3번째 지도자가 되었고, 군에서 중령으로 계급이 올라갔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탱크병들을 훈련시켰으며, 전쟁이 끝난 후, 아이젠하워는 대위계급으로 돌아갔고, 1922년까지 메릴랜드 주 캠프미드에서 일하기 전에, 짧은 시간동안 소령으로 진급되었다. 탱크 전쟁에서 그의 흥미는 조지 S. 패튼과 다른 군 지도자들과 함께 많은 대화를 함으로써 강화되었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들은 상관들에 의해 무시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1924년까지 복무한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폭스 코너 장군에 선임 참모가 되었다. 코너의 보호 아래 그는 군사의 역사와 이론을 공부하였고, 자신의 군사적 생각에 코너의 엄청난 영향을 인정하였다. 1925년 ~ 26년에 그는 캔자스주 포트리번워스에 있는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그러고나서 1927년까지 조지아주 포트베닝에서 대대 사령관을 지냈답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동안 평화의 군대에서 아이젠하워의 경력은 침체하였는데, 그의 많은 친구들은 임금이 높은 직업을 가지기 위해 전역을 하였다. 그는 존 퍼싱 장군에 의하여 감독된 미국전투기념위원회에 선임되었고, 그러고나서 육군 전쟁 대학교로 가고나서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전쟁 차관 조지 V. 모즐리 장군에 선임 참모를 지냈ㄷ바니다.
그는 그러고나서 1935년까지 육군 참모총장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 최고 군사 보좌관을 지내고, 그는 자신이 필리핀 정부에 보조 군사 조언자를 지낸 필리핀으로 맥아더 장군을 동행하였다. 이 지정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패튼, 윈스턴 처칠과 버나드 몽고메리의 성격을 다루는 것을 위하여 귀중한 준비를 마련하였다. 소령으로서 16년의 세월 후, 아이젠하워는 1936년 중령으로 진급되었답니다.
1939년 아이젠하워는 미국으로 귀국하고, 워싱턴 D. C., 캘리포니아주와 텍사스주에서 일련의 직원 위치를 보유하였다. 1941년 6월 그는 텍사스주 포트샘휴스턴에서 육군 3단의 사령관 월터 크루거 장군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9월 준장으로 진급되었다. 자시의 행정적 능력들이 인지되었어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들거가기 전날 그는 전혀 활성 명령을 지니지 않았고, 주요 작전들의 잠재적 사령관으로서 숙고로부터 멀리 있었다.
1944년 12월 20일 연합군 사령관에서 자신의 상급 직위의 인정으로서 그는 대부분의 유럽 육군들에서 육군 원수의 계급에 동등한 육군 장군의 계급으로 승진하였다. 그가 지닌 이것과 이전의 높은 사령관직들에 아이젠하워는 리더십과 외교를 위한 자신의 위대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직접 실행을 보지 않았어도 그는 최전선 사령관들의 존중을 얻었다. 그는 패튼과 오마 브래들리 같은 어려운 부하들과 처칠, 몽고메리 육군 원수와 샤를 드 골 장군 같은 연합군들과 함께 교묘하게 다루었다. 그는 전력의 의문들에 처칠과 몽고메리와 함께 근본적인 의견 불일치를 가졌으나 이 일들은 그들과 그의 관계들을 드물게 전복시켰다. 그는 소련의 육군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와 협상하였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를 안에 있던 그런 자신감으로 그는 어쩌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직접 일하였답니다.
아이젠하워는 유럽 전구에서 자신의 리더십으로 명예 훈장이 제공되었으나 거부하여 그것은 용기와 용맹을 위하여 예약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일은 오버로드 작전이 성공했던 확실성이 전혀 아니었다. 노르망디 침입의 타이밍과 위치를 포함한 전체의 결정을 둘러싼 끈기는 자신이 필요했을 경우에서 아이젠하워가 전진에 쓴 짧은 연설에 의하여 요약되었을 것이다. 그것에서 그는 최종적인 결과였어야 할 치명적인 실패를 위하여 완전한 책임을 지었다. D-데이에 성공적인 상륙이 일어나고 그들에 관한 아이젠하워의 잠시의 연설의 BBC 방송이 있던 오랜 후에 전혀 사용되지 않은 연설문이 측근에 의하여 셔츠의 주머니에서 찾아졌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우리의 상륙들은 실패하였고, 난 군인들을 철수시켰습니다. 이때 공격하는 나의 결정과 장소는 최고의 정보 제공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용감한 자들이 할 수 있던 전부를 군인, 공중과 해군이 했습니다. 시도로 아무 핑계 혹은 결함 첨부가 온다면 그것은 홀로 나의 것입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에 이어 아이젠하워는 프랑크푸르트에 기지를 둔 미군 점령 지구의 군사 지사로 임명되었다.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소련을 위한 각각의 하나로 4개의 점령 기구들로 나누어졌다. 추가로 홀로코스트의 궁긍적 해결의 일부였던 수용소들의 완전한 발견에 그는 그 발생의 아무 의심을 방지하는 데 포악의 증거를 종합적으로 문서화를 카메라 기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답니다.
그는 항복한 적군들로서 미국의 구금 아래 독일의 전쟁 포로들을 재 분류하는 데 논쟁적 결정을 만들었다. 항복한 정군들로서 그들은 무급 징집 노동으로 복무하는 데 강요될 수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수가 영양 실조의 결과로서 구금에 죽었어도 소련, 독일과 프랑스의 지배 마저 아래 잃어진 포로들의 수들로 비교할 때 요소에 노출, 치료 부족의 손실이 적었답니다.
아이젠하워는 독일의 주요 산업 지대들을 국제적 통치 아래 두어 대부분의 대지를 농업으로 넘긴 모건소 계획의 초기 후원자였다. 1945년 11월 그는 점령된 독일에서 미국의 군사 공무원들에게 상세하게 계획을 흥행하고 묘사한 헨리 모건소 2세의 책 〈독일은 우리의 문제이다〉의 수천권의 무료 사본의 분배를 찬성하였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참모총장으로 지냈다. 1950년 12월 그는 나토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유럽에서 나토군의 작전 사령이 주어졌다. 정계 입문에 아이젠하워는 1952년 5월 31일 군사 복무로부터 퇴역하였다. 그는 미국 군사 회고록들 중의 하나로서 넓게 여겨진 〈유럽 십자군〉을 저서하였다. 이 시기 동안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나토 사령관으로서 지낸 동안 대학으로부터 휴식을 택하였어도 1948년부터 1953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답니다.
- 대통령과 재임기간
자신의 많은 전쟁 시기의 성공들 후에 아이젠하워 장군은 미국에 위대한 영웅으로 돌아왔다. 그가 귀국한 지 짧은 후에 공화당에서 "아이젠하워 선발" 운동이 고립주의자 오하이오주 상원 로버트 태프트의 후보직에 맞서는 데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후보직을 선언하는 데 그를 설득시켰다. 그는 참았으나 성원자들이 예비 선거들에서 그의 이름에 들어가고 그는 우승하기 시작하였답니다.
"I Like Ike" 선거 운동 배지들은 그의 성원자들 중에 인기있게 되었고, 아이젠하워는 결국적으로 대통령직을 위하여 나가는 데 순서대로 그의 명령을 완화하는 데 의문하였다. 그는 공화당 후보 지명을 위하여 태프트를 꺾었으나 아이젠하워가 보수적인 국내 정책을 따른 동안 태프트는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려 한 동의서로 왔답니다.
아이젠하워의 선거 운동은 트루먼 행정부의 한국 전쟁의 기소에 대항하는 개혁 운동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대한민국에 가고, 그리고 전쟁을 끝내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강한 나토의 현존을 유지하는 데 약속하였다. 그와 그의 러닝메이트 리처드 닉슨은 압도적 대승리에서 민주당의 애들레이 스티븐슨을 꺾어 20년 만에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데 첫 공화당원과 20세기에 미국 대통령을 지내는 데 단 하나의 군사 장군으로 특정을 지었답니다.
- 사망
1961년 1월 17일 아이젠하워는 오벌 오피스로부터 자신의 최종적으로 텔레비전 방송된 연설을 하였다. 국가로 자신의 작별 연설에서 아이젠하워는 냉전의 논쟁과 미국 군대의 역할을 제기하였다.
아이젠하워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스버그에 있는 전쟁터에 인접한 작은 농장집으로 퇴직을 하였다. 퇴직 생활에서 그는 정치적 인생으로부터 완전히 후퇴하지 않았으며, 1964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연설하고 게티스버그로부터 공화당 선거 운동 광고에서 배리 골드워터와 함께 나왔습니다.
민간 사무소에 있는 동안 군사 계급을 보유하는 데 관계된 법적인 논쟁들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로 들어가기 전에 육군 장군으로서 자신의 영구적 위임을 사임하였다. 자신의 대통령 기간들의 완료에 아이젠하워는 미국 육군에 복귀하여 다시 오성 장군으로 의뢰되었답니다.
1969년 3월 28일 새벽 12시 25분 아이젠하워는 78세의 나이에 워싱턴 D. C.에 있는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애빌린에 위치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도서관에서 명상의 장소로 불린 작은 교회당에 자신의 부인과 어린 시절에 사망한 첫 아들을 따라서 잠들어 있다. 그의 장례식은 그의 아래 부통령을 지내고, 당시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에 의하여 주재되었기 때문에 유일무이하였습니다.
소속 선수 산프레체 히로시마 (1987~2001) → 교토 퍼플 상가 (1998 / 임대) 베갈타 센다이 (2002~2003)
감독 산프레체 히로시마 (2004~2007 / 코치) 일본 U-18 대표팀 (2005) 일본 U-20 대표팀 (2005~2007) 산프레체 히로시마 (2007~2009 / 코치) 알비렉스 니가타 (2010~2011 / 코치) 산프레체 히로시마 (2012~2017) 일본 U-23 대표팀 (2017~2021) 일본 대표팀 (2018 / 코치) 일본 대표팀 (2018~ )
일본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8년부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답니다.
현역시절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간판 스타로 활약했고, 감독으로서 친정팀을 J리그에서 3번 우승시켰다. 일본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면서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남자축구 은메달과 2019 AFC 아시안컵 준우승, 2020 도쿄 올림픽에서 4위, 2022년 EAFF E-1 풋볼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선수들도 훌륭했지만, 그라운드 바깥 벤치의 대처도 대단했다. 일본 사령탑의 임기응변이 자국을 16강으로 이끌었다. 반면 유럽의 명장은 아시아 감독에게 무너졌다.
2일(이하 한국 시각) 오전 4시, 카타르 도하에 위치한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2022 FIFA(국제축구연맹) 카타르 월드컵 E조 3라운드 일본-스페인전이 킥오프했다. 경기 결과는 2-1, 일본의 역전승이었다. 일본은 전반 11분 알바로 모라타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후반 3분 도안 리츠, 후반 6분 다나카 아오의 연속골로 경기를 뒤집었다. 이로써 일본은 1위로 16강에 간답니다
루이스 엔리케 스페인 감독은 세계 최고 명문 중 한 곳인 바르셀로나를 이끌던 시절 '궁극의 트레블'을 기록했던 바 있다. 2014-2015시즌 '엔리케의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라 리가, 스페인 코파 델 레이,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거머쥐었다. 루이스 엔리케가 얼마나 비범한 지도자인지가 입증된 하나의 순간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무적함대' 스페인의 선장 자리까지 꿰찼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루이스 엔리케 감독보다 모리야스 하지메 일본 감독이 위였다. 전반전까지는 루이스 엔리케 감독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경기 결과를 종합하면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의 판정승이 됐습니다.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0-1로 뒤진 채로 들어온 후반을 교체 카드와 함께 시작했다. 대승을 이룬 독일전과 같은 패턴이었는데, 이것이 스페인전에도 그대로 적중했다.
일단 후반 3분, 도안 리츠가 동점골을 터뜨렸다. 일본은 체력을 단숨에 소진하겠다는 듯 미친 듯 질주해 공을 얻었는데, 그렇게 얻은 볼을 도안 리츠가 강력한 왼발슛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내친 김에 곧장 역전골까지 만들었다. 힘을 쓴 김에 다 쓰려는 일본이었고 공포에 빠진 스페인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측면 작업을 통해 다나카 아오가 역전골까지 성공했답니다.
이제 리드를 빼앗긴 루이스 엔리케 감독은 반드시 교체카드를 써야 했다. 그렇게 왼쪽 라인을 단숨에 바꿔버렸다. 조르디 알바와 안수 파티가 들어왔다. 그러자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곧장 대응책을 내놨다. 숨겨뒀던 아스널의 디펜더 토미야스 타케히로를 넣으며 좌측에 시동을 건 스페인을 우측 수비 강화로 통제하려 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역전에 성공한 뒤 철저하게 수비적으로 임하며 승점 3점을 지켜냈다. 루이스 엔리케 감독에겐 더는 방책이 없었다. 이렇게 종국에 웃게 된 쪽은 모리야스 하지메 일본 감독이었다.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전반전에 닥친 위기를 적절한 교체 카드로 극복했고, 상대의 마지막 수마저 손에 쥐고 있던 카드로 막아냈답니다.
유럽 최고의 명장 중 1명이 아시아의 도전적인 사령탑에게 무너진 순간이었답니ㅏ
日 스타일 축구 보여준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 - 2022. 11. 24
"축구는 경기하지 않으면 결과를 모른다. 지금까지의 세계 축구를 생각하면, 오늘의 승리는 '서프라이즈'라고 하는 것 생각하지만, 일본 축구의 레벨은 세계에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 모리야스 하지메 일본 대표팀 감독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축구 강호를 연이어 격파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이변의 연속이다. 일본은 23일(이하 한국시간) 카타르 알 라얀의 할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독일과 벌인 월드컵 조별리그 E조 1차전에서 2-1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이를 바라보는 대한민국 축구 팬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22일 사우디아라비아는 '축구의 신' 메시가 있는 아르헨티나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각본없는 드라마를 써내려갔다. 일본은 '전차군단' 독일을 격파했다. 이제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시선은 대한민국에 쏠리고 있다. 전날 경기에서 후반전 교체 출전해 대역전승에 힘을 보탠 미나미노가 경기를 마치고 한 인터뷰에서 "한국도 뭔가 특별한 일을 낼 능력이 있다"며 "이기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답니다.
일본은 전반전 내내 독일에 밀리면서 끌려다니는 경기를 했다. 전반 45분 동안 독일은 슈팅을 12번이나 시도했다. 일본은 단 1개 밖에 시도하지 못했다. 결국 전반 32분 일카이 귄도안(맨체스터 시티)에게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허용했다. 그렇게 독일이 무난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사실로 굳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격이 시작됐다. 하지메 감독은 후반 10분 만에 교체 카드 3장을 사용했다. 이어 후반 28분 2명을 추가로 교체 투입하면서 교체 카드를 모두 사용했다.
먼저 교체 투입된 미토마 가오루(브라이튼), 미나미노 타쿠미(AS 모나코), 도안 리쓰(SC 프라이부르크)가 후반 29분 동점골을 합작해 냈다. 이어 후반 37분 또 교체 투입된 아사노 다쿠마(VfL 보훔)가 후방에서 날라온 롱패스를 그대로 슈팅으로 연결해 경기를 뒤집었다. 결국 하지메 감독의 작전은 '신의 한 수'가 됐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이 용병술을 두고 독일이 아닌 다른 국가 대표팀이라도 막아낼 수 있었을까 하는 얘기도 적잖게 나오고 있답니다.
앞서 하지메 감독은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독일은 월드컵 우승국이고, 월드컵 우승은 우리의 목표이기에 독일은 우리의 롤 모델"이라면서도 "독일을 상대로 다른 어느 팀을 상대할 때와 같이 최선을 다해야 하며, 내 목표는 16강의 벽을 넘어 8강 진출"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일본 스타일 축구 만들어냈다
올해 54세인 하지메 감독은 2018년부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그는 현역시절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간판 스타로 활약했다.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최후방에 위치하며, 경기 내내 수비적인 역할을 해내는 포지션이다. 어느팀이건 최고의 테크니션들이 깔려있을 가능성이 크다. 천재적인 위치 선정이 요구되는 자리다. 은퇴할 때까지 공식전 434경기에서 48골을 기록하며 일본 사커 리그 2부 리그 준우승, J리그 1994 준우승, 일왕배 4회 준우승(1987, 1995, 1997, 1999) 등에 기여했답니다.
은퇴 후 8년 뒤 친정팀이었던 산프레체히로시마 감독직을 맡으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첫 시즌에 J리그 우승을 거두며 첫 번째 감독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사임 전까지 세 번 우승을 거뒀으며, 2015년 FIFA 클럽 월드컵에서 3위를 이끌기도 했다. 성공적인 감독 생활을 이어간 그는 금메달이 기대됐던 도쿄올림픽에서 스페인에 패하며 4위를 거두자, 일본 국민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마 고조 일본축구협회장은 하지메 감독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그를 지지했다. 앞서 2018년 7월 고조 회장은 하지메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 배경에 대해 "일본의 축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라면서 "일본의 장점을 살려 일본 다움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라며 하지메 감독 선임 이유를 밝히기도 했답니다.
이른바 '일본 스타일' 축구는 '빠른 패스의 경기'로 정리할 수 있다. 스타 플레이어 한 명의 골 파워가 아닌 여럿이 협동해 공격을 전개해 나가는 플레이를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조직력이 생명이다. 예컨대 해외파 선수들은 이런 유기적인 호흡을 맞추기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메 감독이 해외파 선수들의 기용을 줄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일전에서 보여준 연속적인 선수 교체도 크게 보면, 개개인 선수의 교체가 아닌 교체 선수들이 한몸으로 움직여 압박하며 경기 흐름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믿음은 곧 결실로 나타났다. 겸직 중인 일본 U-23 대표팀 감독으로 2018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의 16년만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이자 2010년 대회 금메달 이후 8년만의 아시안 게임 메달 획득을 이끌어냈다. 이는 카타르 월드컵에서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경기가 결코 우연이 아닌 실력이었음을 입증하는 경력이기도 하답니다.
3년 후 자국에서 열린 202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2012년 대회 이후 9년만에 일본의 4강 진출을 이끌기도 했다. 이어 일본의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만들어냈다. '삼바축구'하면 브라질을 떠올리듯 이제 일본 축구는 하지메 감독을 빼놓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 셈이다.
하지메 감독은 이번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세대 교체 카드를 꺼내들었다. 2019 AFC 아시안컵에서 뛸 선수들을 철저히 본인 취임 후 평가전에서 실험한 선수 위주로 뽑았다. 더 이상 해외파 선수들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판단이 깔린 결정이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컨디션적인 부분과 젊은 선수들로의 세대 교체를 고려했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벨기에 리그에서 시즌 10골째를 기록한 카마다 다이치를 뽑지 않았다. 대신 아사노 다쿠마를 발탁했고 그 배경으로 본인이 직접 독일에서 그의 플레이를 보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아사노 다쿠마는 전날 독일과의 경기에서 후반 37분에 교체 투입, 강한 오른발 슛으로 역전골을 만들어낸 바로 그 선수다. 이는 단순 선수 교체가 아닌 하지메 감독의 세대 교체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답니다.
성공적인 세대 교체에 이어 하지메 감독은 다양한 전략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가지 계획을 구상한 가운데 경기에 돌입했다. 잘못되었을 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한 점 차 승부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침착하게 후반에 경기 운영을 바꿔 승부를 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를 두고 하지메 감독의 선수 경력을 접목해보면, 전방은 물론 후방을 책임지는 미드필더 포지션이 큰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결국 중원을 호령하며, 경기 전체를 운영했던 미드필더는 이번 월드컵 무대에서 명실상부 일본 스타일의 축구를 전 세계에 알렸다. 그의 독일전 승리 소감과 마찬가지로, 일본 축구 레벨이 세계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필리프 트루시에 전 일본 대표팀 감독은 "대단하다. 역사에 남을 이변"이라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또 일본의 주요 조간 신문은 대표팀의 독일 격파 소식을 1면 톱기사로 다뤘다. 아사히는 '역사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마이니치는 '도하의 환희'라고 보도했다.
외신도 일본 축구를 높게 평가했다. 영국 BBC는 "일본은 26%에 불과한 점유율로 독일을 꺾었다"며 "숫자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결과지만, 후반전에는 일본이 더 좋은 경기를 했다"고 평가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출신 BBC 해설자 크리스 서턴은 "후반부터 일본이 제대로 싸우기 시작했다"며 "독일은 리드를 빼앗긴 후 크게 흔들렸다"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이 E조를 흥미롭게 만들었다"며 일본에 축하 인사를 전했답니다.
'스타 노래강사'로 유명한 바다새 가수 김성기가 호소력 짙은 보이스로 '더트롯쇼' 무대를 뜨겁게 달궜답니다.
김성기는 지난 14일 방송된 SBS FiL, SBS MTV '더트롯쇼'에 출연해 신곡 '사랑은 고맙고 이별은 미웁고'를 열창했다.
이날 갈색 재킷에 핑크색 스카프로 댄디한 매력을 과시한 김성기는 차분하지만 빠져드는 미성으로 신곡 무대를 꾸미는 한편, 호소력 짙은 감정 표현으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무대를 꾸며 박수를 자아냈다. 특히 방송 후에는 김성기의 무대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직캠이 '더 트롯쇼' 유튜브 채널에도 공개돼 팬들의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지난 해 선보인 '사랑은 고맙고 이별은 미웁고'는 '사랑바보' 이후 모처럼만에 발표한 신곡으로,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눈 친구 송광호가 작곡을, 김성기 본인이 작사를 맡은 성인 발라드 장르다.
김성기는 "코로나라는 어려운 시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힐링송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라고 밝혔답니다.
한편 대한민국 3대 스타 노래강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김성기는 현재 '김성기바다새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생방송으로 팬들을 만나 활발한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바다새 김성기, 팬들과의 스페셜 이벤트 '중국 크루즈 콘서트' 성황 - 2019. 4. 9
올해로 가요계 데뷔 33주년을 맞은 바다새의 멤버 김성기가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답니다.
지난달 29일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는 500여명의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들이 발길을 옮긴 것은 중국행 크루즈.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뤄진 여행객들은 하나같이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처럼 들뜨고 설렌 모습이었다.
크루즈 출발과 함께 커지는 여행에 대한 설렘과 더불어 바닷길에 대한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를 즈음, 선상에서 열린 방송인 조영구와 함께 하는 흥겨운 노래자랑 한마당이 이들의 긴장감을 단번에 날려주었습니다.
이어서 목적지인 중국의 유럽이라 불리는 ‘위해’에 도착해 장보고 기념비, 환취루 공원, 선산두 등 위해의 관광명소를 돌아보며 여행의 흥이 한창 달아오른 이들은 이 여행의 종착점인 블리스호텔 콘서트홀로 발걸음을 옮겼답니다.
블리스호텔에서 이들을 반긴 것은, 바다새 멤버 김성기의 콘서트였다. 사실 이 여행객들은 ‘김성기 노래교실’의 회원들이었던 것이다. 그 곳에서 콘서트를 함께 하며 이들은 하나 됨을 느끼며 그 어떤 여행에서도 맛볼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986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그룹 ‘바다새’의 멤버 김성기. 올해로 음악인생 33주년을 맞은 그에게는 이번 여행이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바로 노래강사로서 제2의 삶의 살아온 지 25주년이 되는 해인 것이랍니다.
‘대한민국 노래강사 3대 천왕’이라고 불리울 만큼 노래교실계의 톱스타인 김성기.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김성기 노래교실’을 운영한지 25년 만에 수도권에만도 회원수가 수천명에 이르며 노래교실 계의 넘사벽 스타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중국 위해 크루즈 여행 및 김성기 콘서트는 그의 노래강사 25주년 기념으로 노래교실 제자이자 자신의 오랜 팬이기도 한 회원들과 특별한 여행을 위해 엠미디어 여행사가 함께 준비한 스페셜 이벤트였다. 이에 김성기는 바다새 활동 당시의 명곡들을 선보임은 물론, 노래교실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의 숨겨진 매력을 한껏 발산하며 회원들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김성기의 노래교실’ 25주년과 더불어 팬들과의 첫 해외여행을 축하하고자 진시몬, 이병철, 김민교, 국상현, 나상도, 서지안 등 동료가수들도 먼 바닷길 여행에 동행해 주었다. 이들은 크루즈 선상에서는 물론 블리스호텔에서의 콘서트에서 함께 무대에 오르며 김성기의 오랜 음악활동에 경의를 표하고, 가수로서 노래강사로서 오랫동안 더 큰 사랑을 받길 응원해 주었다.
김성기는 최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바보가 되어도 좋다는 순애보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신곡 <사랑바보>를 발표하고 ‘콘서트 7080’, ‘가요무대’ 등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솔로가수로의 성공적인 데뷔를 인정받았다.
가수활동과 노래강사를 병행하고 있는 그는 팬들과 직접 소통하며 노래의 즐거움을 전하는 노래강사가 된 것이 자신의 인생 최고의 선택라고 말한다. 그 즐거움과 보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크기에 남은 인생도 노래강사로서의 열정을 불태우고 싶다고 하며, 인생 2모작 중이라고 웃는 김성기의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이 느껴졌답니다.
한편 김성기는 ‘주부들의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최근 트로트계의 아이돌 진해성이 소속된 KDH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맺어 앞으로 더욱 활발한 방송활동이 기대된답니다.
Mnet 트로트 오디션 트로트 X를 이어 미스코리아+프로듀스 101 방식을 트로트 버전으로 바꾼 TV조선에서 내일은 미스트롯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답니다.
- 김양의 근황은?
미스트롯’ 트로트 가수 김양, 신곡 ‘가시오’ 발매 - 2022년09월04일
‘미스트롯’ 트로트 가수 김양이 ‘MBC 두 번째 남편’ OST ‘습관처럼’ 이 후 오랜만에 ‘동양풍 발라드’ 로 컴백했다. 김양이 내 놓은 발라드 ‘가시오’는 임영웅 ,박서진 ,김혜연 ,박군 등 많은 유명 가수들과 함께 작업을 해온 작곡가 날아라 야옹이<이창우>가 직접 프로듀싱해서 완성된 곡이랍니다.
김양의 ‘가시오’ 는 온전히 김양 표 ‘소울 발라드’ 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보컬과 멜로디 라인이 고급스러우면서도 김양만의 풍부한 소울이 가득 담겨진 곡이다. 무엇보다 김양의 음색이 더욱 깊고 진하게 어우러져 가슴 절절한 목소리로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으로 풍성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가시오’는 국악기와 오리엔탈 악기의 색체가 묻어나 있는 음악으로 동양풍 느낌을 극대화 시
켜 감성과 애절함을 동시에 담아 만든 특별한 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어 그동안 김양이 팬들과 대중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특별한 소울 발라드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믿고 듣는 파워 보컬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답니다.
김양은 트로트계 ‘숨.듣.명’(숨어 듣는 명곡을 보유한 가수)같은 존재다. 2008년 ‘우지마라’ 로 트로트 시장에서 단 번에 스타가 됐고, 이후 ‘당신 믿어요’ ‘흥부자’ ‘웃어야지’ ‘내 사람’ 등 숨어 있는 명곡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트로트가수로도 손꼽히고 있다. 한편 김양은 ‘미스트롯’에 출연해 가장 핫 한 이슈 스타로 주목을 받으면서 예능, 음악방송 등 출연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김양 "과거 연예인과 교제..이상형=다니엘 헤니" - 2022. 5. 12
김양이 과거 연애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11일 방송된 TV조선 '퍼펙트라이프'에서는 트로트가수 김양이 출연해 일상을 공개했다. TV조선 '미스트롯'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김양은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을 체감 중이다. 살도 안 빠지고 갱년기 증상도 의심되는 중이다. '퍼펙트라이프'를 통해 일상을 점검 받고 싶어 출연했다"고 이야기했답니다.
김양은 "4년째 2명의 아이와 8년째 1명의 아이를 후원 중이다"라는 이야기로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데뷔 초 월급 80만원 받았을 때부터 시작했다. 통장 잔고가 7만원 남아 딱 한 번 후원을 못 했다"는 김양의 선행에 모두가 놀라움을 표했다.
이어 김양은 친언니의 호출로 한 결혼정보회사로 향했다. 결혼 정보 회사에 생년월일 및 자신의 개인정보를 알린 김양은 "3년 전이 마지막 연애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과거 연애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전한 김양은 "연애 경험은 7번이다"라는 말로 시선을 모았다. 결혼 정보 회사 직원은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며 놀라움을 표했답니다.
적은 연애 경험에 대해 김양은 "진득하게 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제일 오래 만난 사람은 7년이다"라는 솔직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이를 들은 홍경민이 "(7년이라는 연애 기간은) 결혼을 생각할 기간 아니냐"고 물었다.
홍경민의 질문에 김양은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다. 탤런트였던 분도 계시고 뮤지컬 하던 분도 있다"라고 말했다. "얼굴 엄청 보나 보다"라는 말엔 "탤런트 했던 친구는 잘생기지 않았다"라는 유쾌한 농담을 던지기까지 했답니다.
솔직하게 과거 연애사를 전한 김양은 이상형으로 다니엘 헤니를 뽑았다. "옛날에 같이 프로그램을 하며 만난 적이 있다. 실제로 보니 너무 잘생겼더라"라고 이야기한 김양은 이어 이상형을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김양은 "부모님과 같이 산다. 남편은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이거나 친정 근처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부모님의 건강을 이유로 들었다. "아버지는 오래 당뇨를 앓고 계시고 어머니도 혈액암을 앓고 계시다"라는 김양의 말에 결혼 정보 회사 직원은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효도하는 것도 너무 좋지만 부모님에게는 결혼이 더 큰 효도일 것이다"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남겼답니다.
프로입단 1997년 2차 1라운드 소속팀 LG 트윈스 (1997~2005) KIA 타이거즈 (2006~2009)
1997년 LG 트윈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며 상당한 기대를 모았으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데뷔시즌이던 1997시즌 7경기 2패에 방어율 13.50에 그쳤고, 5월 4일에는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경기에서 선발등판하여 5:27이라는 역대 최악의 대패의 원흉이 되기도 했다. 1998년에는 부상으로 인한 재활로 출장하지 못했답니다.
그러다가 1999년 6월 28일 해태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등판해 5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데뷔 첫 승리를 기록하더니 7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 데뷔 첫 완봉승에 성공하며 무너진 LG 마운드의 난세영웅이 되기도 했다.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스윙맨으로 나오며 4승3패4세이브에 방어율 4.21로 입단 3년만에 드디어 1군 무대에서 제 몫을 했답니다.
2000년에는 두산과 LG의 플레이오프 6차전에 등판해서 김용수가 다 이겨놓은 9회초 2아웃에서 동점홈런, 연장전에서는 역전 홈런을 맞아 한국시리즈 진출을 놓치기도 했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역전패를 허용한 임팩트가 워낙 커서 2000년에 부진한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장문석은 정규시즌에는 상당히 잘 했답니다.
2000년은 6연승에 잠시나마 탈삼진 1위도 해보기도 했고, ERA는 3.42로 리그 6위인데 이는 우승팀 현대의 주축투수였던 정민태, 김수경보다도 높은 호성적이었다. 심화지표로는 스탯티즈 기준 ERA+ 130.9(선수 시절 2위), FIP+ 130.7(3위)에 WAR은 3.42를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로 여겨지는 2002년보다 높다. 이 성적은 00시즌 LG에서 데니 해리거 다음 가는 성적으로, LG의 토종 에이스 역할을 했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못한 것이 이미지로 굳어버렸을 뿐이랍니다.
2000시즌 장문석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보직이동[3]과 마구잡이식 등판으로 인해 후반기에는 거의 퍼져버린 상태였다.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의 원흉이 된 데는 2차전에서는 김동주에게 강습타구를 맞았고, 5차전에서는 심정수에게 역전 홈런을 맞는 등 부진했음에도 불구, 그것을 감안하지 않고 올려버린 이광은 감독의 책임이 크다. 더불어 페넌트레이스 때 이상하게 투수운용을 해서 장문석이 퍼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까지... 아무튼 이 때 이광은 감독이 장문석을 혹사시키는 바람에 그 여파는 2001년까지 이어져 ERA 7.74를 기록하는 등 크게 부진했답니다.
그러다가 2002년 다시 각성, 이동현, 이상훈과 함께 든든한 승리조가 되어 LG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크게 일조했다. 이 때의 기록은 전천후 투수로 등판, 무려 10승 3패 4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1.60. 참고로 이 사람, 59경기에서 100이닝 넘게 소화했다. 이동현과 신윤호에 비해서 해당 선수가 묻혀서 그렇지 원조 살려조라고 봐조 무방한 수준이랍니다.
이후 2003년에도 전천후로 나와 39경기 100이닝을 소화했다. 전반기 불펜으로는 부진했으나 시즌 중반 전격 선발 전환후 7승을 기록하며 총 9승을 거뒀다. 2004년에는 선발투수로 주로 나와 150이닝 동안 10승을 올리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526 대첩 항목과 아래 흑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향이 매우 강했고, 또한 김성근 재임 시절 혹사의 여파인지, 부상에 줄곧 시달리기도 했다. 장문석의 이미지가 이도저도 아닌 이미지로 굳어진 것은 이광은 - 김성근 - 이광환 세 감독이 계속해서 혹사시키는 바람에 퍼져서 생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랍니다.
2005 시즌이 끝난 후 손상정, 한규식과 함께 마해영, 서동욱, 최상덕을 상대로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되었다.[5][6] 여담으로 장문석은 KIA로 트레이드될 당시 자신의 친정팀인 LG를 대놓고 디스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팀을 위해 뼈빠지게 던졌는데 돌아오는 것은 토사구팽이니 그럴 수밖에 없답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로[7] 인해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KIA 이적 후 첫 시즌인 2006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나와 1승 3패 15세이브를 기록하여 겉으로는 괜찮은 성적을 냈으나, 후반기부터 맞아나가기 시작하며 마무리 자리를 윤석민에게 내준다. 이후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면서 2007년과 2009년에는 1군 경기 출전 기록이 없고, 2008년에는 밑의 통산 기록에서 보다시피 승패 없이 패전처리조 격으로만 나와 승, 패, 세이브, 홀드 중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김진우에게 노장진을 소개시켜 나쁜 물을 들였다고 KIA팬들에게 이미지도 안 좋다. 김진우의 해명에는 한두 번 만난 게 다였다곤 하지만.
결국 2009 시즌 후 KIA에서 방출당했다. 2009년 한국시리즈 이후 선수단 정리 과정에서 방출당한 것이랍니다.
이후 자신의 스승인 김성근 감독 밑으로 들어와 재기하기 위해 SK 이적을 시도하였으나, 무릎 부상이 재발해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부상 문제와는 별개로, KIA 시절인 2006년 5월 9일 문학 SK전에서 장문석은 SK의 외국인 타자였던 시오타니 가즈히코를 맞췄는데, 시즌 초 SK의 주전 3루수로 타선에서 맹타를 휘두르던 시오타니는 이 때 손가락 골절상을 당하며 방출당했고, 시즌 후 그대로 선수 경력을 접고 말았다. 팀 역시 용병의 갑작스런 전력 이탈로 전체적으로 일정이 꼬이면서 6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조범현 감독도 물러났다. 그런 장본인을 영입하려는 데 대한 SK 팬들의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답니다.
은퇴 후 모교인 부경고등학교(경남상고에서 바뀜)의 코치를 지냈고, 이후 감독을 맡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 과거 주목받았던(?) 경기는?
선수 본인이 대량실점하며 큰 인상을 남긴 경기가 꽤 있다.
입단 첫 해인 1997년 어린이날 3연전의 두번째 경기인 5월 4일 대구 삼성전 선발로 등판했다가 정경배의 연타석 만루홈런 중 첫 번째를 헌납했고, 1⅓이닝 7피안타 10실점을 기록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때 LG의 투수력은 가히 막장을 보여 주었던 것이, 삼성과의 3연전 중 홈런 17개를 포함 무려 49점(…)을 내 주면서 시리즈를 스윕당했다. 이 경기 이후에 천보성 당시 LG 감독이 부정배트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 막장성을 더해주었답니다.
그리고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4-3으로 앞서고 있던 9회초 투아웃에서 김용수로부터 교체되어 등판하였으나 안경현에게 동점홈런을 허용하고, 그리고 연장전에서는 심정수에게 역전홈런까지 맞으며 LG의 21세기 고난의 서막을 열어제꼈다. 다만 이는 전술했듯 플옵 내내 부진했는데도 장문석을 올렸던 감독의 책임이 큰 부분이랍니다.
또한 2005년 5월 26일 롯데전에서는 무려 1이닝 7실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날 경기는 결국 엄청난 난타전이 된 끝에 롯데가 13:11로 승리랍니다.
배우 박성훈(37)이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영화 '유포자들'(감독 홍석구)을 통해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 이후 3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왔다.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휴대전화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사회, 사람들이 무심코 촬영한 영상들이 어떻게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그린 범죄 추적 스릴러 영화랍니다.
연출을 맡은 홍석구는 KBS PD로,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 출연하며 박성훈과 인연을 맺었다. 최근 뉴스1과 만난 박성훈은 "그때 워낙 사랑도 많이 받아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신뢰도도 높았다"라며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주셨는데 굉장히 흥미롭고 흡입력이 있는 글이더라, 그래서 읽자마자 바로 '제가 할게요'라고 했다"고 밝혔다.
박성훈은 극중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던 선생님인 도유빈으로 분해 한 사건에 휘말리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한다. 다만 선(善) 역은 아닌 주인공이럽나다.
이에 대해 "주인공이 비도덕해서, 해서는 안 되는 불법 영상물을 촬영하고 소지하고 있고 결혼을 눈앞에 앞둔 상황에서도 클럽을 간다는 게 쉬이 납득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라며 "최대한 공감이 가는 감정선으로 끌어내려고 세밀하게 상의해 가면서 장면을 만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휴대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건이고, 이 작품이 얘기하고 있는 주제처럼 모두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게 편리하기도 하지만 공포스러운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지 않나"라며 "그것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 게 현시대에 유의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부담이나 무게감보다는 영화의 주제에 공감을 많이 했다"고 강조했답니다.
박성훈은 이 영화를 이끄는 원톱 주연으로 나선 것에 대해 "원톱 주인공물을 좋아해서 한 명의 감정선을 쫓아가는 영화를 흥미롭게 보는 편"이라며 "그런 작품에서 메인 롤을 맡아서 가고 싶었고, 그래서 고민할 것 없이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100신 정도 나왔는데 상당히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게 되더라"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100분 짜리 영상을 통해 영화가 가진 속도감을 전하며 콤팩트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며 만족감을 드러냈습니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22-TV 시네마 작품이기도 한 '유포자들'은 극장에서 먼저 개봉한 뒤 OTT 플랫폼인 웨이브에서 공개되고, 이후 KBS에서도 방송될 예정이다.
박성훈은 다양한 플랫폼에서 이번 작품을 선보이게 된 데 대해 "요즘 OTT가 강세를 띄면서 영화와 (TV의) 경계가 많이 무너졌다"라며 "그래서 TV형 영화라는 신종 장르가 생긴 것 같고, 그 점에서 KBS가 유의미한 시도를 하는 것 같다"고 봤다. 이어 "'유포자들'이 TV 시네마라는 새로운 장르로 적절한 결과물이 탄생했다고 느꼈고, 찍을 때도 (영화와 드라마의) 중간 정도 속도라고 느껴지더라, 영화가 호흡이 차분하고 여유가 있다면, 드라마는 촉박한데 그 중간 템포였다"고 설명했답니다.
그러면서 "지금 '유포자들'이 올라운더 플레이어가 됐다, 극장에 걸리고 웨이브에도 공개되고, TV 방송도 되니까 모든 매체를 섭렵하게 된 것"이라며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봐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되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경각심을 더 갖게 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볼 수 있길 바라고, 작품의 의도와 주제가 잘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박성훈은 2019년 종영한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주연인 장고래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그는 '장고래' 타이틀에 대한 소회도 털어놨다.
"장고래라는 타이틀은 너무 감사한 이름이다. 사실 박성훈이라는 이름이 흔해서 오히려 각인이 잘 안 되는 편인데, 그 캐릭터는 기억을 잘해주시더라. 그래서 나를 기억해줄 수 있는 명칭이 생긴 거라 감사하다. 특히 주말드라마가 워낙 파급력이 있는 자리이고, 수많은 선배님들이 거쳐 오지 않았나. 나도 그 전철을 따라 간 거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주말극 이미지를 버리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콘텐츠를 찾아가고자 하고 있다."라고 전했답니다.
그는 "철저히 상업적인 배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든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볼만한 작품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며 "그래서 글을 읽고 재미가 있는지, 흥미가 있는지를 본다. 내가 맡은 캐릭터가 다소 처지더라도 작품이 재밌으면 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올해 데뷔 15년 차에 접어든 박성훈은 그간 연기 활동을 돌아보며 "개인적으로 일상적인 내용의 작품에서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추구해왔고 그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장르적인 작품에서는 180도 확확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바람을 내비쳤다. 이어 "'천문' 촬영 당시 함께 했던 한석규 선배님이 '음악을 연주하듯,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며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연기를 하고 싶단 생각이 딱 들었다, 그때 선배님의 조언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울었다"며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솔직하게 덧붙였습니다.
박성훈 "'더 글로리' 송혜교→이도현, 좋은 인연 만나 행복" - 2022. 11. 19
배우 박성훈이 차기작 활동에 대해 밝혔다. 18일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유포자들'의 배우 박성훈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유포자들'은 핸드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사회, 사람들이 무심코 촬영한 영상들이 어떻게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그린 범죄 추적 스릴러.
박성훈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비밀을 강제 잠금해제 당한 남자 '도유빈' 역을 맡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렬한 모습을 선보인다.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한 절박함부터 '유포자'를 향한 폭발하는 분노까지 선보일 예정이랍니다.
박성훈은 올해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부터 영화 '유포자들'을 촬영했고, 현재 '선산'을 촬영하며 '열일'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더 글로리'가 넷플릭스와 첫 작업인데 작업 환경이 프로페셔널하다고 느꼈다. 모든 게 계산됐고, 현장에 빈틈이 없다고 느꼈다. '이게 자본의 힘인가'라는 생각도 했다"고 웃으며 "넷플릭스 구독자로서, 제 얼굴과 연기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보여진다는 것에 큰 기대감이 있다"고 밝혔다.
'더 글로리'를 통해 배우 송혜교, 이도현, 임지연 등과 호흡을 맞춘 박성훈은 "처음 만나는 배우들이 많았는데 또래여서 그런지 급속하게 친해졌고 촬영 종료 시점에 술자리를 가질 정도로 팀워크가 좋았다. 서로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돼서 소중한 인연이 만들어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도 참 열심히 달려왔다. '더 글로리' 촬영을 끝냈고, '선산'과 공개가 안 된 다른 드라마 촬영도 하고 있다.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데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포자들'을 시작으로, '더 글로리'부터 내년에 많은 작품이 공개될 예정인데 2023년을 맞이하는 과정이 기쁘고 설렌다. 내년에도 바쁠 것 같다"고 웃었답니다.
박성훈 "'조선구마사' 역사 왜곡, 막중한 책임감 죄송" - 2021. 3. 27
배우 박성훈이 SBS 월화드라마 '조선구마사'의 역사 왜곡 논란과 방영 폐지에 출연 배우로서 사과했습니다.
박성훈은 27일 오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먼저 이번 사태에 대해 많은 분들께서 따끔하게 꾸짖어주시고 우려해 주시는 글들을 빠짐없이 읽어보며 '조선구마사'의 출연 배우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면서 자필 사과문을 게재했다.
이어 "작품으로 실존 인물을 다룸에 있어 부담감과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창작과 왜곡의 경계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했다. 그저 배우로서의 소임은 연기에 진심으로 다가서 주어진 캐릭터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어리석고 모자란 생각이 있었다"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언급했답니다.
박성훈은 "이로 인해 받는 질타는 달게 받겠다. 사안의 심각성과 배우에게도 역사적 인식과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뒤늦게 깨닫고 있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조선구마사'는 당초 16부작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지난 22일 1회부터 역사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 논란에 휩싸였다.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자, '조선구마사'는 결국 제작과 방영 모두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2회짜리 드라마로 끝맺었답니다.
이날 앞서 장동윤, 이유비가 '조선구마사' 출연 배우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사과한다는 입장문을 냈습니다.